“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뿐”
아버지는 유독 딸을 좋아했다. 딸도 아버지의 옆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종 딸에게 감홍로주를 만들도록 시켰다.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지금도 영화처럼 생생하다. 딸의 삶이 깊어질수록 진한 손맛이 담겼고, 감홍로주의 붉은 빛깔도 더욱 농염해졌다.
“하지만 술은 오빠들이 만들어야 한다.”
이 씨는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1988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살림에 몰두했다. 그러나 작은오빠가 사망한 날, 그는 세상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북한 술을 왜 우리가 공인해야 합니까?” “진짜 감홍로주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법과 제도는 유독 감홍로주에 대해서만 냉혹했다. 무형문화재는커녕 식품명인 지정을 받기도 어려웠다.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하면 문서상 근거를 대라고 했다. “집에서 배웠다”고 하면 “최종 명인은 이기양 씨이므로 이 씨에게 배운 근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5년이 됐다. 경영학 박사인 남편이 아이디어를 냈다.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하면 전통주를 만들어 팔 수 있었다. 일단 대중에게 먼저 알리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 씨 부부는 1억 원을 출자해 ‘㈜감홍로주’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경기 파주시에 공장을 세웠다. 2006년에는 주류 면허를 얻어 감홍로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다시 한 번 식품명인 지정 신청을 냈다.
지루한 절차가 2년여간 이어졌다. 그사이 담당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요구하는 서류도 많아졌다. 경기 과천시와 파주시를 수차례 오갔다. 그래도 부부는 묵묵히 감홍로주를 만들었다. 매년 1억 원 넘는 적자가 났지만 아버지가 남긴 문화재를 끊기게 할 순 없었다.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이달 9일 감홍로주 제조 기능 보유자로 이 씨를 인정하고 명인으로 지정했다. 최근에는 백화점 납품도 시작했다. 12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명인 인증서를 받는 순간. 그는 오히려 덤덤했다.
“너무 간절했던 것이 이뤄지면 오히려 허무하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요.”
조선 3대 명주 ‘감홍로주’ 제조 계승자 이기숙 씨의 名人되기 12년(동아일보)
파주=유성열 기자 ryu@donga.com